1960년대 미국 시민권 운동을 이끌었던 '빅 6' 지도자들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감내할 수 없는 극단적 상황까지 간 것이 북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의 시작이었던 것처럼 폭발 일보 직전까지 온 한반도 위기 상황은 극적인 반전의 전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전제는 대화다. 서로를 대화 상대로 인정하고 얼굴을 맞대야 한다.
안철수처럼 주변에서 다 뜯어말리고 아직 시기가 아니라면서 혀를 차는 와중에도 정말 무리하게 서둘러서 전면에 나섰던 정치인이 역사적으로 하나 떠오른다. 오늘 불쌍하게 끌려나온(쿨럭;) 역사적 인물은 무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즉 러시아 볼셰비키당의 지도자이자 소련 건국자 되겠다. 1913년 무렵 망명지 스위스에서의 레닌의 상황은 안습 그 자체였다.
짜르의 군인들은 짜르의 초상화를 들고서 짜르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그들의 고통을 달래주실 자애로운 짜르를 보고 싶다며 짜르의 궁전으로 행진해 오던 노동자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 아울러 "탐욕스런 귀족들과 악랄한 관료들이 자애로운 짜르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지만 우리가 직접 가서 짜르께 호소하면 잘 들어주시고 모든 문제가 풀릴 것"이라고 믿었던 노동자들의 소박한 환상도 그 피의 일요일에 완전히 박살이 났다. 오히려 짜르가 문제의 핵심이고 이 모든 고통의 근원이었다는 것이 러시아 안팎의 모든 이들에 백일 하에 폭로되고 말았다.
신념을 짊어진 목소리가 반드시 옳으리란 법은 없다. 하지만 목숨을 걸면서까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정상적인 창구는 어째서 없었는지를 돌아볼 만큼의 호소는 되어야하지 않을까. 2016년 한국의 눈에 이 영화는 어떻게 비칠까. 교도관들만 불쌍하다. 지가 선택해서 죽는 건데 뭐가 문제야. 익숙한 비아냥들이 벌써부터 귓전에 울리는 것만 같다. 아니 누군가 목숨을 걸고 호소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려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스스로의 안위를 버린 수많은 목소리들이 들리지 않고 있는 것처럼.